보고타는 돌봄과 이동을 한 블록 안에, 그리고 도보권 안에 접어 넣는 실험을 도시정책의 전면에 올려놓았다. 여성의 무급돌봄에 공간을 부여한 돌봄블록(Manzana del Cuidado)과 자동차를 물러서게 한 바리오 비탈(Barrio Vital)은 서로 다른 부처가 주관하지만 '근접성(proximidad)'이라는 하나의 지향을 공유한다. 방문단은 2024년 7월 10일 남서부 보사(Bosa) 엘 포르베니르 현장을 답사하고, 이튿날 하베리아나 대학교에서 도시계획 세미나를 이어가며 이 실험이 서울의 15분·생활권계획에 던지는 물음을 마주했다.
보고타의 근접성 정책을 '15분 도시'로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이 도시가 공식 프레임으로 내건 이름은 ‘Bogotá a 30 minutos(30분 도시)’다. 파리·밀라노가 채택한 '15분'을 그대로 빌려오지 않고, 급경사 외곽과 방대한 저소득 정착지, 만성적 교통난이라는 자기 조건을 반영해 도달 시간을 정직하게 늘려 잡은 것이다. 이름 하나에도 라틴아메리카 대도시가 근접성 담론을 그대로 수입하지 않고 자기화한 흔적이 남아 있다.
'30분 도시'는 단일 사업이 아니라 여러 정책을 꿰는 우산 개념에 가깝다. 그 아래에서 돌봄서비스를 도보권으로 집적한 돌봄블록과, 동네 단위로 자동차를 물러서게 한 바리오 비탈이 각각 '시간의 근접'과 '공간의 근접'을 담당한다. 방문단이 하루에 두 정책을 나란히 답사한 것도 이 둘이 한 몸의 앞뒷면이기 때문이다.
돌봄블록(Manzana del Cuidado)은 2020년 클라우디아 로페스(Claudia López) 시장(2020~2023) 하에서 출범한 지구돌봄체계(Sistema Distrital de Cuidado)의 물리적 거점이다.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지구단위 공공돌봄체계로 평가받으며, 그 핵심 발상은 단순하고도 급진적이다. 돌봄제공자(대다수 여성)와 그들이 돌보는 피부양자(아동·노인·장애인)를 위한 공공서비스를 도보권 한 블록(manzana) 안에 집적한다는 것이다.
왜 이런 발상이 필요했는가는 숫자가 말한다. 보고타 여성의 약 90%가 무급돌봄노동을 수행하며, 전일제로 돌봄에 매인 여성은 약 30%에 이른다. 2021년 기준 여성 무급노동의 경제적 가치는 콜롬비아 GDP의 약 13%, 보고타 GDP의 약 20%로 추산됐다. 보이지 않던 이 노동을 도시가 처음으로 '공간'으로 인정하고, 돌봄에 매인 여성이 자신을 위한 시간을 되찾도록 서비스를 도보 거리 안에 모아 준 것이 돌봄블록이다.
한 블록 안에 담기는 서비스는 두 갈래다. 돌봄제공자에게는 고졸 학력 취득, 직업상담, 법률·심리 상담, SENA(국가직업훈련청) 훈련, 창업지원, 여성건강 프로그램 MujerESalud가 제공된다. 그동안 피부양자는 아동 놀이·학습 공간이나 휴식돌봄공간에서 돌봄을 받는다. 즉 '돌보는 사람이 서비스를 받는 동안 돌봄 대상도 함께 맡아 주는' 구조가 한 지붕 아래에서 성립한다. 농촌 지역에는 이 서비스를 실어 나르는 이동형 Buses del Cuidado 2대까지 운용된다.
현장에서 방문단이 마주한 것은 정책 브로슈어가 아니라 일상의 도구였다. 공용 세탁실에 나란히 놓인 세탁·건조기, 아동이 그린 벽화로 채워진 학습·놀이 공간, 그리고 여성건강 상담 배너가 한 건물 안에 공존했다. 무급돌봄에 매여 세탁조차 자기 시간을 빼앗기던 여성에게 '빨래를 맡기고 상담을 받는' 몇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가 이 평범한 시설들에서 오히려 또렷하게 읽혔다.
돌봄블록은 2020년 시우다드 볼리바르와 보사에서 시범 도입된 뒤 빠르게 확산해, 로페스 시장 임기 말인 2023년 말 기준 26개소(2023년 말 21개 운영 + 2024년 상반기 5개 추가)에 이르렀다. 발표 기준 수혜 인원은 54만여 명이다. 이 성과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2022년 블룸버그 글로벌 메이어스 챌린지(Bloomberg Global Mayors Challenge)를 수상했고, UN ECLAC(CEPAL)의 지원과 UN Women·세계은행의 현장 방문이 이어졌다.
돌봄이 '시간의 근접'이라면, 바리오 비탈(Barrios Vitales, '생명의 동네')은 '공간의 근접'을 다룬다. 이는 보행자를 우선하는 저교통 동네(low-traffic neighborhood)를 전술적 도시계획(tactical urbanism) 기법으로 조성하는 사업으로, 교통국(Secretaría Distrital de Movilidad)이 주관한다. 참조 모델은 명확하다. 바르셀로나의 슈퍼블록(superilla)과 런던의 저교통 동네(LTN)다.
방문단이 답사한 보사 엘 포르베니르(Bosa El Porvenir) 바리오 비탈은 2023년 9월 개장한 사례로, 보행공간 3,000㎡ 이상, 안전 교차로 17곳, 횡단보도 69개소를 갖추고 약 6.3만 명을 대상으로 한다. 최초 사례인 산 펠리페(San Felipe, 바리오스 우니도스, 2022년 8월)에서 검증된 기법이 저소득 대규모 주거지로 확장된 것이다.
현장은 '전술적'이라는 말이 왜 붙는지 한눈에 보여 줬다. 대규모 토목 없이도 노면에 칠한 컬러 표시, 차량 진입을 막는 화분과 볼라드, 시속 10km 저속존 표시, 자전거도로만으로 도로의 성격이 바뀌어 있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컬러 노면 위를 보고타 관계자들과 함께 걸으며, 값비싼 인프라가 아니라 '누구의 속도로 도로를 쓸 것인가'라는 결정이 동네의 성격을 바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바리오 비탈은 개별 시범에 그치지 않고 신 국토이용계획 POT('Bogotá Reverdece')에 총 33개소가 규정됐다(2027년까지 신규 7개, 2035년까지 총 33개 목표). 실험이 하나의 제도로 고정되고 있다는 뜻이다. 답사 동선에서 이어진 자전거 학교(Escuela de la Bici) — IDRD가 운영하는 붉은 컨테이너 교실 앞에 시민의 자전거가 늘어선 풍경 — 는 저교통 동네가 단순한 차량 억제가 아니라 '걷고 타는' 이동문화를 함께 길러내는 정책임을 보여 줬다.
답사의 출발점은 보사의 지역발전센터(CDC El Porvenir)였다. 계단식 대형 공공건물의 정면 입구에는 '돌봄(Cuidado)'을 내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하나의 공공건물이 학습·문화·행정·돌봄 서비스를 한자리에 모으는 이 방식은, 돌봄블록·바리오 비탈이 공유하는 '집적을 통한 근접' 논리의 원형에 해당한다. 흩어진 서비스를 시민이 찾아다니게 하는 대신, 서비스를 시민의 동네로 모아들이는 것이다.
저소득 외곽에 이런 대형 공공거점을 앞세운 배경에는 사회적 형평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도심의 인프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근접성 정책의 효용이 크다는 판단이다. 근접성을 '가진 동네를 더 편하게'가 아니라 '없던 동네에 먼저'의 원칙으로 운용한다는 점에서, 보고타의 실험은 근접성 담론에 형평의 방향성을 뚜렷이 얹고 있었다.
현장 답사에 이어 방문단은 보고타시 관계 부서와 회의실에서 정책 브리핑과 협의를 이어갔다. 돌봄블록은 여성·평등 정책, 바리오 비탈은 교통 정책으로 소관 부처가 다르지만, 두 정책 모두 '동네 단위 근접성'이라는 하나의 도시전략 안에 놓여 있다는 점이 논의의 핵심이었다. 부처 칸막이를 넘어 근접성이라는 목표를 공유할 때 비로소 서비스가 한 블록 안에 모인다.
이튿날인 7월 11일, 방문단은 라칸델라리아의 하베리아나 대학교(Pontificia Universidad Javeriana)로 향했다. 예수회가 세운 보고타의 명문 사립대이자 도시계획 연구의 거점으로, 캠퍼스 진입부에는 방문단을 맞는 환영 배너가 걸려 있었다. 세미나실에서는 방문단과 현지 연구진 사이에 AI 도시계획·마이크로시티 관련 지식공유 실무회의가 진행됐고, 양측이 발표자료를 공유하며 방법론을 주고받았다.
다만 답사 이튿날 대학 연구진과의 세미나가 배치된 구성 자체가 시사적이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근접성 정책을 대학의 연구·방법론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정책이 실무의 즉흥이 아니라 지식 기반 위에서 지속가능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방문단이 준비해 간 AI 근접성 계획 논의가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접점을 찾은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그간 15분·생활권계획과 AI 기반 근접성 분석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생활서비스의 접근성을 격자 단위로 측정하고 부족한 곳에 시설을 재배치하는 방법론은 이미 서울과 국내 도시 실증으로 축적돼 있다. 보고타의 실험은 이 방법론이 놓치기 쉬운 두 지점을 정면으로 건드린다.
첫째는 '무엇에 닿을 것인가'의 문제다. 서울의 근접성 지표가 보통 편의·문화·의료 시설의 물리적 거리에 초점을 둔다면, 보고타는 여기에 '돌봄'과 '젠더'를 명시적으로 얹었다. 무급돌봄에 매인 이의 시간을 되돌려 주는 것을 근접성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둘째는 '누구를 위한 근접인가'의 문제다. 저소득 외곽에 먼저 투자하는 형평의 원칙은, 접근성이 이미 높은 도심을 더 매끄럽게 다듬는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계획에 균형추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