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고가철도가 연 700만 명을 부르는 선형공원으로, 그리고 그 이면의 젠트리피케이션까지
2024.7.3(수) 뉴욕 · 콜롬비아·뉴욕 출장 연재 ①
콜롬비아로 향하는 장거리 여정의 경유지, 맨해튼에서 하루가 주어졌다. 목적지는 분명했다. 버려진 화물철도 고가를 걷어내지 않고 공원으로 되살린 하이라인(The High Line)과, 그 북단에 이어 붙은 초대형 복합개발 허드슨 야드(Hudson Yards)다. 도시재생과 민관협력의 세계적 성공 사례로 인용되는 동시에, 젠트리피케이션 논쟁의 한복판에 선 두 장소를 하루 동선으로 엮어 걷고 기록했다. 이 글은 6부작 뉴욕·콜롬비아 출장 연재의 첫 번째로, 하이라인과 허드슨 야드를 중심에 두고 브라이언트 파크·첼시 마켓·타임스스퀘어를 도심 재생의 맥락으로 함께 담는다.
1. 죽음의 거리에서 폐선까지 — 하이라인의 전사(前史)
하이라인의 뿌리는 화려하지 않다. 맨해튼 서측을 남북으로 지나던 화물철도 웨스트사이드 라인(West Side Line)은 본래 지상을 달렸고, 10번가는 열차와 보행자가 뒤섞여 1910년까지 500명 넘는 보행자가 목숨을 잃은 '죽음의 거리(Death Avenue)'로 악명이 높았다. 이 위험을 걷어내기 위해 철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린 고가 노선이 1934년 완전 개통했다.
그러나 트럭 물류가 철도를 밀어내면서 노선은 빠르게 쇠퇴했고, 1980년 마지막 화물열차를 끝으로 운행이 완전히 중단됐다. 이후 20년 가까이 고가는 잡초와 야생화가 스스로 뿌리내린 방치된 구조물로 남았다. 철거 압력이 거셌지만, 철길 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풍경이 역설적으로 훗날 공원 구상의 원형이 됐다.
'하이라인의 친구들'이라는 우연
1999년 소유주 CSX가 재활용 공모를 열자, 지역 주민 조슈아 데이비드(Joshua David)와 로버트 해먼드(Robert Hammond)가 커뮤니티위원회 청문회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두 사람은 철거 대신 보존을 주장하며 비영리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 Line)'을 설립했고, 이 풀뿌리 조직이 이후 20여 년간 공원의 설계·기금·운영을 이끄는 핵심 주체가 된다.
버려진 인프라를 철거 대상이 아니라 '자원'으로 다시 본 시선의 전환이, 오늘의 하이라인을 만든 첫 단추였다.
2. 설계와 개장 — 4단계로 이어 붙인 2.33km
하이라인의 설계는 세 팀의 협업으로 완성됐다. 조경 총괄은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 건축은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Diller Scofidio + Renfro), 그리고 식재 디자인은 자연주의 다년생 정원으로 유명한 피트 아우돌프(Piet Oudolf)가 맡았다. 방치된 철길에 저절로 자라던 야생 식생의 인상을 의도적으로 재현한 식재가 이 공원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약 2.33km(1.45마일) 길이의 선형 고가공원은 한 번에 열린 것이 아니라 네 단계에 걸쳐 순차 개장했다. 남단부터 북쪽으로 조금씩 연장되며 도시의 성장과 함께 자라난 셈이다.
2.33km
선형공원 총 길이
2009.6
Section 1 개장
2011.6
Section 2 개장
2014.9
Section 3(Rail Yards)
Section 1은 2009년 6월, Section 2는 2011년 6월, 허드슨 야드와 맞닿는 Section 3(Rail Yards)는 2014년 9월에 열렸고, 갈래길 형태의 스퍼(Spur)는 2019년 6월 마지막으로 완성됐다. 현장을 걸으면 침목과 레일의 흔적을 식재 사이에 의도적으로 남겨둔 구간이 이어져, 이곳이 한때 철길이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식재 사이로 이어지는 하이라인 산책로 (하이라인, 오후) · 촬영 2024.07.03 19:29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붉은 벽돌 건물 협곡으로 향하는 보행로 (하이라인) · 촬영 2024.07.03 19:29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레일 흔적을 남긴 목재 데크와 선형 수경 (하이라인) · 촬영 2024.07.03 19:49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특히 인상적인 것은 목재 데크 바닥을 따라 레일 형태로 흐르게 만든 얕은 물길과, 철로의 결을 그대로 살린 바닥 패턴이다. 산업 유산의 물성과 새로 심은 자연이 한 평면 위에서 겹쳐지는 이 디테일이야말로 하이라인이 단순한 '녹화'가 아니라 '재생 서사'로 읽히는 이유다.
▶ 하이라인 현장 영상
저녁 햇살이 드는 하이라인 데크 (하이라인, 저녁) · 촬영 2024.07.03 19:27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고가에서 내려다본 붉은 벽돌 도시 경관 (하이라인) · 촬영 2024.07.03 19:50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 하이라인 산책로 풍경
3. 컨서번시 모델 — 소유는 공공, 운영은 비영리
하이라인이 세계적으로 인용되는 진짜 이유는 풍경이 아니라 거버넌스 구조에 있다. 부지와 시설은 뉴욕시 공원국(NYC Parks)이 소유하되, 운영·기금 조성·프로그램 전반은 비영리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책임진다. 공공이 자산을 보유하고 민간 비영리가 실질 운영을 담당하는 이른바 컨서번시(conservancy) 모델이다.
센트럴파크 컨서번시로 대표되는 이 방식은, 공공 재정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도심 공원의 유지·관리·프로그램을 민간 기부와 자원봉사로 보완한다. 하이라인은 이 모델을 신설 재생공원에 적용해 성공시킨 대표 사례로 꼽힌다.
방문객 규모는 이 모델의 성과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연간 약 700만 명, 누적 2천만 명 이상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경제적 파급효과를 둘러싼 수치는 출처에 따라 편차가 있어 신중히 볼 필요가 있다.
경제효과,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하이라인의 친구들(FOTL) 자체 추산에 따르면 일자리 12,000개 이상, 신규 주거 약 3,000호(그중 affordable 700호), 부동산 투자 50억 달러, 연간 세수 6,400만 달러 등의 효과가 언급된다. 2013년 뉴욕시 분석은 누적 경제효과를 약 10억 달러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들 수치는 상당 부분이 운영 주체의 자체 추산치이므로, '~에 따르면'의 인용값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
하이라인은 '얼마나 아름다운 공원인가'보다 '누가, 어떻게 20년을 운영해 왔는가'로 평가받는 프로젝트다.
4. 허드슨 야드와 베슬 — 하이라인이 촉발한 개발의 정점
하이라인 북단은 대형 복합개발 허드슨 야드와 직결된다. 철도 차량기지 상부를 인공 데크로 덮고 그 위에 초고층 오피스·주거·상업시설을 올린 이 개발은, 하이라인이 만들어낸 지가 상승과 관심을 흡수하며 성장한 '하이라인 효과'의 물리적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 상징물이 벌집을 닮은 계단 구조물 베슬(The Vessel)이다. 영국 디자이너 토머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설계했으며, 154개의 계단과 80개의 층계참으로 이루어져 오르내리며 도시를 조망하도록 고안됐다. 총사업비는 약 2억 달러로 알려져 있고 2019년 완공됐다.
허드슨 야드의 상징 베슬 전경 (허드슨 야드) · 촬영 2024.07.03 17:33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다른 각도에서 본 벌집형 계단 구조물 베슬 (허드슨 야드) · 촬영 2024.07.03 17:34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베슬은 여러 차례의 안전사고 이후 장기간 내부 개방이 중단된 이력이 있다. 답사 당시에도 구조물 내부에 오르는 방문객은 보이지 않았고, 일행은 광장 바닥에서 외부만 올려다보며 촬영했다. 개방 여부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방문 전 확인이 필요하다.
베슬을 둘러싼 허드슨 야드 광장 (허드슨 야드) · 촬영 2024.07.03 17:43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허드슨 야드 안내 사인 (허드슨 야드) · 촬영 2024.07.03 17:37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허드슨 야드와 베슬
베슬을 올려다보는 시선은 하이라인의 소박한 식재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하나는 방치된 인프라를 최소 개입으로 되살린 재생의 문법, 다른 하나는 막대한 민간 자본을 투입해 무(無)에서 창조한 스펙터클의 문법이다. 두 문법이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점이 허드슨 야드 답사의 핵심 관전 포인트였다.
5. 엣지 전망대에서 본 도시 — 재생의 스케일을 읽다
허드슨 야드의 초고층동에는 2020년 개장한 야외 전망대 엣지(Edge)가 있다. 100층 높이로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야외 전망대로 알려져 있으며, 건물 외벽에서 허공으로 돌출된 삼각형 데크와 발밑이 비치는 유리 바닥이 특징이다.
엣지에서 조망한 맨해튼 마천루와 허드슨강 (엣지 전망대) · 촬영 2024.07.03 18:13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하늘로 열린 야외 데크와 조망 인파 (엣지 전망대) · 촬영 2024.07.03 18:14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이 높이에서 내려다보면 하이라인이 촉발한 개발의 스케일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을 따라 새로 솟은 유리 타워들과 그 사이를 실처럼 잇는 하이라인의 녹색 선(線)이, 하나의 재생 서사가 어떻게 도시 조직 전체를 재편했는지를 지도처럼 보여준다.
유리 바닥 아래로 내려다본 허공 (엣지 전망대) · 촬영 2024.07.03 18:43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엣지 전망대 현장
해가 기울 무렵에는 하이라인 남단을 벗어나 허드슨강변으로 향했다. 강 위에 튤립 모양 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만든 부유식 공원 리틀 아일랜드(Little Island)와, 저지시티 스카이라인 너머로 지는 노을이 도심 재생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배경이 됐다.
튤립형 기둥 위의 부유식 공원 리틀 아일랜드 (허드슨강변) · 촬영 2024.07.03 20:08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허드슨강 너머로 지는 노을 (허드슨강변, 저녁) · 촬영 2024.07.03 20:10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6. 첼시 마켓·브라이언트 파크·타임스스퀘어 — 재생의 여러 얼굴
하이라인 인근에는 또 다른 재생의 사례가 촘촘하다. 첼시 마켓(Chelsea Market)은 오레오를 생산하던 옛 나비스코(Nabisco) 공장을 개조한 실내 푸드마켓으로, 60여 개 점포가 산업 시대의 벽돌과 철제 구조를 그대로 살린 내부를 채운다. 공장 건물의 물성을 지우지 않고 상업 공간으로 전환한 '적응적 재사용(adaptive reuse)'의 교과서적 사례다.
옛 나비스코 공장을 개조한 첼시 마켓 외부 (첼시 마켓) · 촬영 2024.07.03 20:36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산업 구조를 살린 실내 푸드마켓 내부 (첼시 마켓) · 촬영 2024.07.03 20:55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 첼시 마켓 내부
도심의 브라이언트 파크(Bryant Park)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뉴욕공립도서관 뒤편의 이 광장은 한때 범죄로 기피되던 공간이었으나, 1988~92년 재정비를 거쳐 1992년 재개장한 뒤 이동식 의자와 상시 프로그램으로 되살아났다. 물리적 개조와 운영 프로그램을 결합해 폭력 범죄를 90% 이상 줄인 것으로 알려진 공공공간 회생의 대표 사례다.
마천루로 둘러싸인 브라이언트 파크 잔디밭 (브라이언트 파크) · 촬영 2024.07.03 16:46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5번가를 걸으며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의 고딕 첨탑과 록펠러 센터 일대를 지나, 하루의 끝은 타임스스퀘어에서 맺었다. 2009년 차로를 걷어내고 보행자 광장으로 전환한 이곳은 밤이 되자 전광판과 인파로 가득 찼다. 라인프렌즈의 K-푸드 마켓 광고가 뉴욕 한복판 전광판에 걸린 장면은, 도시가 콘텐츠와 사람으로 다시 채워지는 또 다른 재생의 얼굴처럼 보였다.
인파로 가득한 밤의 타임스스퀘어 (타임스스퀘어, 야간) · 촬영 2024.07.03 21:38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타임스스퀘어 전광판의 K-콘텐츠 광고 (타임스스퀘어, 야간) · 촬영 2024.07.03 21:50 · 콜롬비아 메데진·보고타 출장
▶ 타임스스퀘어 야경
💡 서울에 주는 시사점
버려진 인프라를 자원으로 다시 보기. 하이라인은 철거가 답으로 여겨지던 폐선 고가를 최소 개입으로 되살렸다. 서울의 유휴 철도·고가·산업 유산도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재해석할 자원'으로 접근할 여지가 크다. 다만 서울로7017의 경험처럼, 이식이 아닌 맥락에 맞는 설계와 식재 전략이 성패를 가른다.
컨서번시형 민관협력 거버넌스. 소유는 공공, 운영·기금·프로그램은 비영리가 20년 이상 지속 담당한 구조가 하이라인의 핵심 성공 요인이다. 개장 이후의 유지·관리·프로그램을 책임질 안정적 운영 주체와 기금 모델을 조성 단계에서부터 함께 설계해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성공의 그림자다. 하이라인은 인접 주택가치를 크게(연구에 따라 약 35% 상승으로 인용되나 수치 편차가 있다) 끌어올린 동시에, 임대료 급등·소상공인 폐업·저소득 세입자 이탈이라는 'eco-gentrification' 비판을 받았다. 재생의 편익이 원주민과 소상공인에게 돌아가도록 부담가능 주택 확보, 임차인 보호, 지역상권 지속 장치를 처음부터 정책 패키지에 포함해야 한다.
적응적 재사용과 운영 프로그램의 결합. 첼시 마켓(산업 유산 전환)과 브라이언트 파크(운영으로 되살린 공공공간)는, 물리적 개조만으로는 부족하며 상시 프로그램과 관리가 공간의 생명을 좌우함을 보여준다. 서울의 공공공간·재생시설도 준공이 아니라 운영에서 승부가 난다.
출처 · 검증 출처: thehighline.org, Friends of the High Line(하이라인의 친구들) 공개 자료, 위키피디아(High Line, Hudson Yards, The Vessel, Edge, Chelsea Market, Bryant Park 항목) 등. 개장 단계·설계자·거버넌스·방문객 규모는 위 출처로 교차 확인했다. 경제효과(일자리·주거·투자·세수), 인접 주택가치 약 35.3% 상승, 베슬 개방 여부, 타임스스퀘어 보행광장 전환 세부는 자체 추산치이거나 출처에 따라 편차가 있어 인용값으로 표기했다.